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(문단 편집) ====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(Kaspar Olevianus, 1536~1587) ====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는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심도시 [[트리어(독일)|트리어]][* [[트리어 선제후국|트리어 대주교]]는 [[신성 로마 제국]]의 3대 성속 [[선제후]] 중 하나였다.]에서 태어났다. 그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[[프랑스 왕국]]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. [[파리(프랑스)|파리]]에서 [[종교개혁]]의 현장을 경험하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[[개신교]]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. 그는 이곳에서 [[장 칼뱅]]의 글을 열심히 공부했고 후에 [[제네바]]에서 칼뱅에게 직접 배우고 테오도르 베자와 평생지기로 인연을 맺었다. 대학 생활 중에 헤르만 루트비히(Hermann Ludwig)라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1556년의 어느날 강가에서 루트비히가 탄 배가 뒤집힌 것을 보았다. 올레비아누스는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그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. 급박한 상황에서 루트비히의 시종은 두 사람 중에서 올레비아누스를 자신의 주인으로 착각하여 구해냈고, 정작 헤르만 루트비히는 죽고 말았다. 이 일로 인해 올레비아누스는 평생 설교를 하며 살겠노라 하나님께 서원했다. 고향으로 돌아간 올레비아누스는 불과 몇 개월 만에 훌륭한 설교자로 이름을 떨쳤다. 마치 도시 전체가 개신교로 개종할 듯이 열띤 분위기가 이어지자, 가톨릭 교회의 핍박이 시작되었다. 올레비아누스는 곧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었는데, 이 소식을 들은 '[[프리드리히 3세(팔츠)|어떤 개신교 영주]]'가 보석금을 내주고 그를 감옥에서 구해내었고 자신의 영지에서 개신교 신앙이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종교개혁 작업을 도와달라고 제안을 해왔다. 그 개신교 [[영주(중세)|영주]]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였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올레비아누스가 대학시절 사귀었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헤르만 루트비히가 프리드리히 3세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